책소개
<귀신·북풍·사람>은 왕전허가 대학생일 때 창작한 처녀작으로, 속으로는 서로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애틋하게 생각하지만, 정작 그 마음을 상대에게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주인공들의 고통과 그로 인한 갈등이 오로지 작중인물들의 내적 독백을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점이 묘미다.
<어느 여름날>을 통해서는 바로 타이완의 깊은 혼혈사를 엿볼 수 있다. 주인공인 바나가 한족 집안으로 시집와서, 한족 사회의 전형적인 고부 갈등을 겪고 남편의 부권(夫權) 의식 때문에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되는 이야기다. 머릿속에서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대로, 따옴표 없이, 작중인물의 의식에서부터 직접 흘러나온 듯이 나열되는 내적 독백은, 가족의 일원이 되지 못한 채 홀로 분노를 삭여야 하는 바나의 혼란스러운 심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해 준다.
<혼수로 받은 수레>는 왕전허를 문단에 각인시킨 대표작이다. 타이완의 산업화에서 소외된 자들, 특히 공동화(空洞化)된 농촌에 남은 농민들의 극심한 경제난을 흥미진진하게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1960년대 타이완 향토문학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가난한 농민인 완파를 단순히 사회적 환경으로 인한 피해자이자 연민의 대상으로 묘사하지 않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인생의 비극이, 실은 그 스스로의 우스꽝스럽고 특이한 성격이 야기한 것은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 보도록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 묘미다. 아울러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타이완 속어와 일본식 한자어는, 타이완의 복잡한 역사와 타이완인들의 삶이 그 무엇보다 ‘언어’에 가장 잘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도록 한다.
<즐거운 사람>에서 왕전허의 창녀에 대한 시선은 독특하다. 창녀를 동정의 눈길로 보는 시각을 피함으로써 독자와 창녀의 계층적 지위를 지우고, 창녀가 창녀를 비웃는 방식으로 이야기의 초점을 전환시킨다. 그럼으로써 그녀들을 인간으로서 의지할 곳 없어 괴로운 것은 아닌지, 엘리트 남성들의 이중적인 면모를 압축적으로 제시해, 매춘을 양산하는 사회구조와 이중적인 도덕률을 용인하는 사회 풍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거리를 제공해 준다. 중간에 삽입되는 당시(唐詩)는, 옛날 사람들이 기생들에게서 느꼈던 운치를 대체하는 역할을 하면서 작품에 독특한 느낌을 더한다.
<라이춘 아주머니의 쓸쓸한 가을>에서는, 중국의 전통적인 가족 관념이 미국의 경제원조와 함께 들어온 미국식 가족 관념에 의해 점차 어떻게 변해 가는지 잘 보여 주고 있으며, 문화적 차이로 인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가족 개념과 ‘전통’이라는 명분만으론 유지되기 힘든 그런 가족 개념 사이에서 시달렸던 타이완 사회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샤오린, 타이베이에 오다>는, 왕전허가 항공사와 방송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하루 종일 마작에 빠져 살고 최신 유행을 쫓아가기 바쁜 직장 동료들을 보면서 쓴 작품이다. 시골에서 올라와 도시의 소시민으로 어렵게 적응하고 있는 ‘샤오린’의 시각을 통해, 타이완 사회에 만연해진 과도한 영어 사용 현상과 세련된 전문 직업인으로 보이기 위해 붙인 영어 이름이, 정작 중국어로 들으면 우스꽝스럽고 해괴망측한 의미가 된다는 것을 언어유희를 통해 풍자적으로 보여 주는 작품이다.‘언어’ 자체와 문학의 ‘형식’에, 과감한 실험과 파격적인 사용을 감행한 왕전허의 창작 기법상의 변화는, 이 작품의 매력을 배가시킨다.
<호랑이 두 마리>는, 사람은 좀 모자라지만 구두 가게 사장인 아샤오와 허우대는 멀쩡하지만 점원인 둥하이라는 대조적인 두 인물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왕전허 소설 속의 평범한 사람들은, 독자에게 동정을 불러일으키고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성토하게끔 하는 불쌍한 사람들이거나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지는 않다. 너무 볼품없고 우스꽝스러워서 작품 속의 다른 사람들이 그를 조롱할 때 독자들을 동참하게 만들기도 한다. 실생활에서 사용하고 있을 것 같은 과격하고 천박하며 외설적인 말과 성적(性的) 농담이 전혀 걸러지지 않고 날것 그대로 등장한다.
200자평
‘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타이완 작가 왕전허의 작품집. 왕전허는 타이완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세대들이 보편적으로 겪은 체험과 처지를 잘 알고 가족관, 산업의 변화, 이농 현상, 미국 숭배 의식 등을 중심으로 작품을 썼다. ‘불협화음적인 조합’을 가진 인물 형상을 만들어 내지만 독자들이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어떤 편견이 개입되지 않도록 한다. 그들의 내면을 전면에 내세우고 어느 누구의 편에 서지 않는 방식으로 인간의 어리석음과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말한다.
지은이
왕전허는 1940년 타이완 동부에 위치한 화롄(花蓮)에서 태어났다. 19세에 타이완대학 외국어문학과(臺灣大學 外文系)에 합격해 도시로 나가기 전까지 줄곧 고향에서 살았다. 대학 2학년 때 처녀작 <귀신·북풍·사람>을 ≪현대문학≫ 잡지에 발표하면서 작가로 등단했다.
전후(戰後) 타이완대학 외문과는, 정부의 과도한 언론·출판·사상 통제와 국민당 정부가 강제로 주입하다시피 한 중화 문화 찬양 및 반공(反共) 문학 일색으로 황폐화된 타이완 문학계를 살리기 위해, 현재 타이완 사회의 실재를 반영한 작품, 그리고 문학 자체에 대한 탐구에 정진할 것을 주장하며 ≪문학잡지(文學雜誌)≫를 창간했다. ≪현대문학≫은 바로 이러한 스승들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청년 세대가 창간한 문예 잡지였다. ≪현대문학≫은 1960년 3월에 창간되어 중간에 잠시 정간되었다가 1984년 5월에 폐간되었는데, 총 206편의 소설이 게재되었고 70여 명의 작가를 배출해, 전후 타이완 문학계에서 명실상부 중추적인 역할을 한 잡지라고 할 수 있다.
왕전허는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화롄중학(花蓮中學)에서 영어를 가르치다가, 2년 뒤 캐세이퍼시픽(Cathay-pacific) 항공사에서 근무했다. 1969년에는 다시 TV 방송국에 입사했는데, 그는 특이하게도 학교에 적을 두거나 전업 작가로 활동하지 않고, 항공사와 방송국으로 이직하며 창작 활동을 했다. 방송국에 근무하면서부터는, 자신이 발표했던 소설들 중 일부를 TV 극본으로 고쳐 써 TV 단막극으로 만들기도 했고, 1972년에는 미국 아이오와(Iowa)대학의 초청을 받아, 타이완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국제 작가 워크숍(International writers’ workshop)에 틈틈이 참여하기도 했다.
초기 대표작들 <귀신·북풍·사람>(1961. 2), <어느 여름날>(1961. 7), <즐거운 사람>(1964. 10), <혼수로 받은 수레>(1967. 3), <이제 다시는(永遠不再)>(1969. 2) 등은 그러한 고향의 정취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특히 <혼수로 받은 수레>는, 왕전허를 타이완 문학사에서 1960년대 향토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기억하게 한 대표작이자 많은 비평가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문학계간(文學季刊)≫이라는 잡지에 발표되었는데, 1966년 10월에 창간되어 1970년 2월에 정간된 이 잡지는, ≪문학잡지≫와 ≪현대문학≫에 대해 척박한 타이완 문단을 일군 선구자로서의 역할은 했으나 아카데믹한 환경에 둘러싸여 타이완 사회의 변화에 소극적인 역할을 한다고 비판적인 평가를 했던 문학 동인들이 만든 것이었다.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화려한 도시 생활에서 목격하고 경험했던 씁쓸하고도 우스꽝스러운 사회 풍경을 주로 작품화했는데, <라이춘 아주머니의 쓸쓸한 가을>(1966. 11), <호랑이 두 마리>(1971. 12), <샤오린, 타이베이에 오다>(1973. 10)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1979년 39세의 젊은 나이에 암에 걸려 오랜 기간 병마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 와중에 <샤오린, 타이베이에 오다>의 모티브와 문제의식을 확장시켜 장편소설 ≪미인도(美人圖)≫(1982)와 ≪장미, 장미여, 사랑해(玫瑰, 玫瑰, 我愛伱)≫(1984)를 발표해 생애 두 번째로 문단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향토 작가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타이완 문단의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1987년에는 <어느 가수의 인생(人生歌王)>, <종신대사(終身大事)> 등과 같은 중편을 몇 편 발표했지만, 1990년 결국 오랜 병마로 심장까지 약해져 5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사후에, 미완성 유고인 중편소설 <두 번의 사랑(兩地相思)>(1993)이 ≪연합문학(聯合文學)≫ 제103기에 발표되었다.
옮긴이
고운선은 부산대학교에서 한문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 석사 과정에서 중어중문학을 전공한 후, 고려대학교에서 중국 현대 작가 주줘런(周作人)에 대한 논문 <周作人 散文에 나타난 문학 담론 연구>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2년 현재 20세기 초반 동·서양 지식 교류의 역사 및 세계사적 지식 담론의 보급과 유통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근대 시기 동아시아의 지식 담론이 어떤 원류를 거쳐 서로에게 영향을 주게 되었는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특히 20세기 초반 지식의 생산과 유통에 중심 역할을 했던 중국의 각종 문예 잡지에 흥미를 가지고 있으며, 당시의 중국 작가들이 번역·출판했던 외국 작가들의 작품 번역본과 여기에서 관찰되는 문화적 길항작용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 중에 있다. 그간 발표 논문으로는 <性 담론의 수용과 周作人의 審美觀>, <현대 중국 사회 納妾의 과도기적 양상>, <1960∼1970년대 왕전허(王禎和)의 초기 단편소설 연구>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타이완 작가 중리허(鍾理和)의 ≪원향인(原鄕人)≫(지식을만드는지식, 2011)이 있다.
차례
혼수로 받은 수레(嫁粧一牛車)
어느 여름날(夏日)
귀신ㆍ북풍ㆍ사람(鬼ㆍ北風ㆍ人)
즐거운 사람(快樂的人)
라이춘 아주머니의 쓸쓸한 가을(來春姨悲秋)
샤오린, 타이베이에 오다(小林來臺北)
호랑이 두 마리(兩隻老虎)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책속으로
“그는 귀머거리야! 걱정할 필요 없어. 그가 들을 수 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한마디 한마디가 징이 울리는 것처럼 단단하게 닫혀 있는 완파의 귓속을 뚫고 들어왔는데, 그 여운이 얼마나 길던지! 출옥한 지 며칠 만에 완파는 얼굴이 온통 벌겋게 되어서, 뜬금없이 남들에게 비웃음을 사고 있는 것이었다.
–<혼수로 받은 수레> 중에서